기무사의 '마파람 공작' 피해자
박태순기일 1992년 08월 29일
당시 26세
약력
1987년 노동운동 투신, 수원지역에서 공장활동 함
1989년 5월 20일 수원 검찰청 검거농성, ‘폭력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구속, 1년 6월 복역 함
1990년 11월 13일 부산교도소 출소, 이후 노동운동을 계속 함
1991년 병무청 영장수취 거부로 주민등록 말소, 기무사의 추적을 받음
1992년 수원, 부천 등지에서 노동운동
1992년 8월 29일 직장 퇴근 후 귀가 중 행방불명 됨
동지의 삶
동지는 이미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사회과학서적들을 탐독하였으며, 1985년 한신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후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자 권익을 위한 민중운동을 지향하는 언더써클에 가입하여 각종 시위 등에 참가하였다. 1989년 5월 수원지검 점거농성으로 인해 징역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출감 후 1991년 2월 19일 군 입대 영장 수취거부로 입영을 거부하고,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진행하였다. 당시 공안기관에 의해 추적당하였고, 1992년 8월 29일 부천시 수영기계에서 퇴근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정에서 1992년 8월 29일 당시 시흥역내 열차사고 사망자의 지문과 동일인으로 확인되었고, 시신은 신원불명의 변사자로 분류되어 용미리 무연고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음이 2001년 드러났고 2002년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기무사의 ‘마파람공작’ 대상이었음이 밝혀진 동지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있다.
묘역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