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 2005년 04월 01일
당시 71세
약력
1960. 4. 19. 한신대학에서 수습위원으로 활동
1961. 3. 1. 목포 영흥중학교 부임, 1개월만에 백지위임장에 도장찍기를 거부하여 파면
1967. 광주상업고등학교 부임
1976.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1977. 광주YMCA 청소년지도자협의회 의장
1980. 5‧18광주민중항쟁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 구속 후 해직
1982. 전국YMCA교사협의회 창립 주도
1983. 나주중학교 복직
1986. 전국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회장, 5‧10교육민주화선언을 주도하고 해직
1987. 담양고서중 복직
1987~88.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1,2대 회장
1989. 5. 28. 연세대 도서관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선포
1989~91.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3대 위원장 역임 (파면, 구속, 수배의 연속)
1990. 국민운동연합 공동의장
1990~94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1-4대 공동의장
1992. 범민련 남측본부 수석부의장
1994. 한겨레신문사 자문위원
1995. 광주광역시 교육위원회 부의장
1998. 충장중학교 복직
1999. 충장중학교에서 정년퇴임
2000. 광주인권운동센터 회장, 5‧18기념재단 4대 이사장
2000~05. 늦봄 문익환학교 설립추진위원장, 동아시아평화‧인권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전국의장, 광주무진교회장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지도자문위원
2005. 3. 31.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월 1일 새벽 2시 30분경 영면
동지의 삶
1935년 광주 금동에서 태어난 동지는 한신대학교 재학 중이던 1960년 4·19혁명 수습위원으로 활동하며 일찍이 민주화의 뜻을 품었다. 1961년 목포 영흥중·고등학교에 교사로 첫발을 내디뎠으나, 사학 재단의 부당한 백지위임장 날인을 거부하다 부임 한 달 만에 파면당하며 참교육을 향한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1967년 광주상업고등학교에 부임하여 다시 교단에 섰다.
윤영규 선생님의 삶은 교육과 사회의 민주화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세 번의 구속과 네 번의 파면이 그의 역정을 말해 준다. 1976년 광주YMCA에서 청소년 서클을 지도하는 활동을 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2개월간 중장정보부 광주분실에 구금되었다.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도청에서 홍남순 변호사, 조비오 신부, 송기숙 교수 등 광주지역 민주인사로 구성된 17인의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보안대에 끌려가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교육 민주화를 향한 동지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1982년 전국YMCA 교사협의회 창립을 주도하였고, 나주중학교 복직 이후인 1986년에는 5·10 교육민주화선언을 주도하여 또 한 번 해직의 칼바람을 맞았다. 그러나 동지는 굴하지 않고 1987년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을 결성하고 1, 2대 회장을 역임하며 교육 민주화 운동의 든든한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마침내 1989년 5월 28일, 동지는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역사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결성을 선포하였다. 전교조 초대부터 3대 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투쟁하는 동안 정권의 가혹한 탄압 속에 파면과 구속, 수배가 끊이지 않았으나, 동지는 굳건히 참교육의 깃발을 지켜냈다.
동지의 헌신은 교육 운동을 넘어 사회 민주화와 통일 운동으로 지평을 넓혔다. 1990년 국민운동연합 공동의장,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공동의장을 지냈으며, 1992년 범민련 남측본부 수석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9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맨 앞줄에 섰다.
1995년 광주광역시 교육위원회 부의장을 지낸 동지는 1998년 마침내 충장중학교로 복직하여 1999년 명예로운 정년퇴임을 맞이했다. 교단을 떠난 이후에도 2000년 광주인권운동센터 회장, 5·18기념재단 4대 이사장, 늦봄 문익환학교 설립추진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인권과 평화, 후학 양성을 위해 남은 힘을 쏟았다.

평생을 참교육과 자주·민주·통일 세상을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바친 동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대의 큰 어른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다 2005년 3월 31일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월 1일 새벽 2시 30분경 영면하였다.
묘역
국립 5‧18민주묘지 1묘역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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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잔
-윤영규 선생님 영전에
도종환
당신은 늘 우리보다 한 발짝 앞에 서 계시었고
더 오래 남아 계시었습니다.
한 발 먼저 감옥에 들어가셨고
더 오래 포승줄에 묶여 계시었습니다.
두 겹 세 겹의 감시를 뚫고 광장으로 나와
오늘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새 장을 연다고
떨리는 음성으로 먼저 말씀하셨고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더 많은 밤을 수배의 고통으로 떠돌았고
더 많은 날을 거리의 교사로 사시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바쳐
당신과 함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그 이름을 이 땅에 새겼고
어떤 이는 참교육의 씨앗을 땅에 묻으며 죽어갔고
어떤 이는 교육노동운동과 함께 늙어갔습니다.
이 땅의 수없이 많은 이들이 자기 전 생애를 던져
고난받는 교사의 길을 가는 동안
그들 모두의 생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당신은 거기 함께 계시었습니다.
안으로 강직하여 밖으로 온유할 수 있던 당신
안으로 뜨거워 말보다 먼저 눈물을 쏟곤 하던 당신
분노보다 정이 더 많고
직책보다 가난이 더 많았던 당신
당신은 죽음조차도 우리보다 한 발 먼저 받으셨습니다.
아직 완성에 이르지 않은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것들을 둔 채 황망히 떠나셨습니다.
순간의 죽음을 영원히 사는 자리로 옮겨 놓는 것을
부활이라 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우리 곁에
영원히 모셔 놓고 싶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큰 고비를 넘을 때나
세우고자 했던 것을 작게나마 완성하는 날도
우리 곁에 당신이 함께 와 계시고
우리가 더 크게 고통받고
더 뼈아프게 괴로워하는 날도
우리 곁에 더 오래 남아 지켜보시기를 소망합니다.
당신이 남기신 향기
당신이 피하지 않던 쓴 잔을 기억하며
우리도 나머지 생을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어느 길을 가든 우리도 결국
당신의 길에 도달할 것입니다
선생님, 한 번만 더
선생님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윤영규 선생님
-2005. 4. 3. 전교조 영결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