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의 과잉진압으로 목숨을 잃다
이태춘기일 1987년 06월 24일
당시 27세
약력
1987년 3월 2일 태광고무(주) 무역부 입사
1987년 6월 18일 6월 민중항쟁의 시위 도중 부산시 좌천동 오버브릿지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
1987년 6월 24일 부산시 봉생병원에서 뇌수술하였으나 운명
동지의 삶
동지는 태광고무(주)의 노동자로 일했다. 1987년 6월 18일 부산 좌천동 오버브릿지 시위에서 전경들이 과잉진압으로 다연발탄과 직격탄을 쏜 후 오버브릿지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시위대가 지나간 뒤, 오선숙씨 등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 4명(남2, 여2)이 지나가는 승용차에 태워서 대연동 재희병원으로 후송했다. 병원의 시설미비로, 다시 봉생병원으로 옮겨 신경외과에서 뇌수술을 하였으나, 1987년 6월 24일 운명하였다. 1987년 6월 25일 부산대 병원에서 부검을 실시하였다. 부검결과 직접적 사인은 뇌좌상이었고 오른쪽 이마 윗 부분에서 정수리를 거쳐 후두부까지 20.5cm에 이르는 종방향 두개골 골절이었다. 그 외 신체 어느 부위에도 일체의 외상이 없었다. 부검 후 22밤 시신을 연산동 시립 부산의료원 영안실로 안치하였다가, 1987년 6월 27일 밤에 범일성당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묘역
양산 가톨릭공원묘원